1. 비(碑)의 기원
비란 각종 기록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나무,돌,쇠붙이 등에 새겨놓은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묘 내부로 통하던 묘문에 세워졌던 것인데, 묘제의 변화와 함께 출구가 사라지면서
무덤 주위로 옮겨 설치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후한(後漢)대에 표면에 문자가 새겨지기 시작했으며 비신(碑身), 비두(碑頭),비좌(碑座)등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비는 수록된 비문의 내용에 따라 묘비 탑비 신도비 사적비 송덕비 불망비 공덕비등 여러갈래가 있는데
대부분 사건 당시 혹은 그와 가까운 시기에 비문의 내용이 기록되기 때문에 역사 문화 서예 등 해당
분야의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비로 가장 오래된 비는 서기 85년에 세원진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이고,
다음은 압록강 대안의 집안에 있는 고구려 호태왕비와 신라 진흥왕대에 건립된 척경비및 순수비등이 있다.
재료에 따라 목비,석비,철비 이외에 마애비와 유리로 된 비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고승의 탑비가 많이 세워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신도비와 묘비가 유행하는 등 시대에 따라
비의 양식이 변모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2.철비의 기원
철비란 철을 재료로 하여 비를 조성한 것을 지칭한다. 언제부터 철을 재료로 비를 만들었지에 대한
뚜렸한 기록은 없으나, 진나라의 학자였던 진수가 편찬한 정사삼국지에는 " 유비의 묘 앞에 철비를
세웠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진수의 기록을 따른다면 늦어도 3세기에는 중국에서 철비가 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한나라(漢, BC 202~ AD220) 시기에 이미 우수한 철기문화를 보유하고
있었으며,진수가 활동하던 시기는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로 정치적으로 혼란기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왕희지의 글씨 고개지의 그림 도연명의 시 등 훌륭한 명사들이 배출되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루던 시기였다
철비에 관한 이른 시기의 국내 기록으로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이안눌이 1640년에 지은
동악집(東岳集)에 회양로에 높이 삼척의 철비가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회양은 현재의 강원도
고성 부근으로 금강산과 인접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철비로는 POSCO역사 박물관 조사 결과 1631년에 제작된 충북 진천군
소재의 <현감이원명선정거사비>이며, 다음으로 강원도 홍천군 소재의 <현감원만향선정비>로
1639년에 제작되었다.
(표: 전국 철비현황)
3.철비 제작시기의 사회 ,경제적 배경
우리 사회에서 철을 자유로이 사용하게 된 것은 채 100년이 안된다. 근대 이전에는 생산과 소유에 대한
통제에 기인하고 현대에 들어서는 40여 젼 전에서야 종합제철소가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이전 우리나라의 철 생산은 원시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던 것이 태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1407년 전국적으로 대규모 철장[철광산]증설을 시행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 때 개발된
철장의 수를 전국적으로 78개소 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5~16세기 철을 제련하는 구체적으로 전하는 기록은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수철 생철 정철 등
철 종류의 구분이 있었다.
수철은 사철과 목탄을 이용하여 용광로에서 녹이면, 철 성분들이 한데 모여 덩어리를 형성한다.
쇠 찌꺼기(쇠똥,슬래그)가 많이 섞인 수철을 용광로에 넣고 다시 가열하면 쇠 찌꺼기가 제거되면서
큰 쇠 덩어리가 형성되는데 이것을 생철이라고 하며, 오늘날의 선철에 해당하는 것으로 민간에서는
흔히 무쇠라고 불렀다. 정철은 수철을 가열하여 공기를 주입하면서 인을 제거하는 공정과 생철을 불에
달구어 여러 번 단조 하는 방법이 있다.
15세기의 철생산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러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444년 당시 함경도 경성 등지의
사철장(사철을 채취하던곳)에서는 하루 6말의 사철을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철 가공업이 발전하면서 수공업자들도 전문화 되는데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무쇠쟁이인
수철장을 비롯하여 주물을 하는 주물장, 단조품을 만드는 야장, 강철을 만든느 화빈장 등이 있었다.
이렇게 철 가공업을 전문으로 하는 수공업이 발전하면서 철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대 되었고 사회적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15세기에 편찬된 농사직설에 의하면 1450년~1456년에 한 지주가 자신의 양아들에게 넘겨준 재산목록에는
철재농기구가 적혀있지 않았다. 이것을 통해 이 시기 까지만 하여도 철재 농기구는 지주 등 일부만이 소유 할 수 있는 중요한 재산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이었던 농기구마저 지주 등 일부
에게 한정되어 사용되던 시절이었기에 다른 용도로 철을 사용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음을 추측할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16세기 말~17세기 전반기에 거듭된 전쟁으로 관영수공업이 파괴 되었으며, 국가로부터
제철업경영권을 위임 받은 '별장'이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철소(철 생산징소)를 사적으로 경영하게 되면서
획기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국가에서 요구하는 철 소요량을 제외한 생산에 대해서는 사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민간에서도
무기를 제외한 철제품을 자유로이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17세기부터 철비제작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은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인 배경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4.철비 제작배경
조선왕조실록 영조 99권 38년(1762년) 5월20일 계축조에는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명나라 고황제가 철비를 세워 환시의 용사를 경계
하였는데, 영락 이후에 태감이 용사하여 우리나라에 사명을 띠고 많이 왔었다" 라는 기사가 있다.
황제의 칙령을 새길 만큼 철비는 위엄과 권위의 상징이었음을 알려주는 사레라 하겠다.
조선시대 철비는 크게 현감, 관찰사 등 지방수령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와 1648년 제작으로
서당을 운영하기 위하여 창립한 전남 진도 학계(學契)비 등의 사적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철은 과거 부의 상징이자 나무나 돌에 비해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중요한
공덕비 건립이나, 맹세의 상징으로 철비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철은 동양사상에서 악한
것을 물리치고, 지기(地氣)가 강한 곳을 누른다는 비보풍수의 목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철비 역시 목비나 석비에 비해 귀중하게 다루어 졌으며 철비가 세워진 가문은 최고의 영광이었다고 한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아래의 3가지 비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1). 刻石頌德 以示 悠遠 則所謂善政碑也 內省不槐 斯爲難矣
" 돌에 덕을 새겨 칭송하여 영원히 본보기가 되게 하는 것은 이른바 선정비라 한다. 마음속으로 반성하여
부끄럽지 않기가 어려운 것이다."
2). 木碑頌惠 有誦有諂 隨卽去之 卽行嚴禁 則母低乎恥辱矣
목비로 은혜를 칭송하는 것 중에는 찬양하는 것도 있고 아첨하는 것도 있으니 세우는 대로 곧 없애
버리고 엄금해서 치욕에 이르지 말게 하여야 한다
3). 조선 인조때 사람 석담 이윤우가 경성판관이 되었는데 경성은 수 천리 밖 외진 변방으로 옛 석막의
터였다. 그 풍속이 오랑캐와 섞이어 더욱 다스리기 어려웠다. 공이 정성껏 다스리고 죄를 지어도
용서하였다. 돌아간 뒤에 그 고을 사람들이 철비를 만들어서 사모하여 마지 않았다.
이 기록은 세상 사람들이 비를 마구 세우는 것에 대한 경계와 함께 철비 건립의 가치를 기록한 것이다.
이 외에도 고전소설 임진록과 만정판 춘향가에 철비 기록이 전한다.
철비는 17~18세기 들어 제작이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것은 선정을 베푼 수령의 증가가 아닌,
아이러니 하게도 원성을 듣던 수령이 직접 세우는 사례가 증가하며, 부를 축적한 중인계층들이 양반으로
신분을 바꾼후 조상의 정통성을 가공하기 위해 철비를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이 외에 울진군 내성행망비와 같이 보부상의 객주를 칭송하는 철비가 세워지는 등 조선 후기는 신분제가
급격히 붕괴되고, 부를 축적한 집단이 권력과 명성을 독차지 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후 철비는 일본의 침탈과 함께 더 이상 제작되지 못하였으며, 종국에는 전쟁물자로 수탈되어 극히
일부만이 현존하게 되었다.
5. 철비 관련 자료
1) 1939년 12월 9일자 동아일보 7면 3단
전남 순천군 송광면 대곡리 김용식은 지난 11월15일경 자기 밭에서 일하다가 길이가 4척 폭이 1척
중량이 71근의 철비를 발굴하였는데 그 비에는 행부사백락륜선정비 을미륙월 이라고 새겨있는 것을
보아서 고대의 것은 아니나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고물상들이 날로 찾아와서 팔라고 성화를 하나
김용식은 팔지 않고 그 자손들이 있으면 찾아가기를 바란다고 한다.
2) 소설 임진록
"전장 혼백이 되었으니 불쌍하고 가련하기로 밥을 지어 위로 하니 착실히 흠향하더라" 하시더라
이 때는 정유년 삼월이라 이여송의 철비(鐵碑)를 세워 천추에 유전케 하고 홍비단 백 필로 승전기를
만들어 세우고 승전고를....
3) 만정판 춘향가
"<중중모리> 춘향모친이 들어온다. 이 소문을 늦게야 들었든다, 엎어지고 자빠지며 관문 앞으로
우르르 춘향 앞에 엎어지며 " 아이고 내 딸이 죽었네 아이고 이 몹쓸 년아 누가 너를 열녀라고
석비 철비 세월줄 거나 아이고 이게 웬일이냐 이방상존 호방상존 내 딸이 무삼죄요 칠십 당년
늙은 년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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